조각의 역사

 

 

2002. 3. 4작성, 2003. 12. 4 수정  김성회

 

-조각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서양조각사가 중심이 되고 서양적 시각에서 분석하여 왔다. 예로 '이교도'라는 용어는 기독교가 바른 교회라는 사상을 내포하고, 오리엔트라는 말은 유럽의 시점에서 동방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문명이 구미의 영향력 아래 발달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아의식과 아시아의 국제적 위상 강화로 아시아나 우리 나라 미술도 새로운 주목을 받고, 고고학의 발달로 아프리카나 다른 대륙의 미술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 글은 주로 서양부분을 다루었음을 밝힌다 -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간의 흔적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290여㎞ 떨어진 인도양 연안의 블로보스 동굴에서 발견됐다고 AP가 2002년 1월 10일 보도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추상화는 프랑스의 여러 동굴들에서 발견된 3만5000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었는데, 이번 발견은 인류 추상화의 기원을 3만5000년 정도 더 앞당긴 7만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 추상화는 철광석의 일종인 ‘오커(ocher)’의 표면을 평평하게 한 다음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균등한 간격으로 대각선 여러 개를 긋고 다시 반대방향으로 대각선을 그어 마름모꼴과 삼각형을 표현한 것 등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작품 발견으로 인류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빨리 근대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동물 등 구체적 형태를 그렸다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지만 삼각형과 같은 추상적 형태는 남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발굴에 참가한 미국 뉴욕주립대의 크리스토퍼 헨실우드(Henshilwood) 박사는 이들 추상작품이 '의도적인 패턴'이며 '당시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상징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의 미술에서 새기는 것과 그리는 것, 즉 조각과 회화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물론 현대적 의미에서라면 새기는 것은 부조로서 평면을 파괴하는 것이고, 그리는 것은 평면을 평면으로 남겨두고 형태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위의 예는 인간의 추상적인 개념과 의도가 반영된 미술사의 기원을 앞당긴 사례로 앞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들 지식의 범위는 넓어지고 수정되어 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보통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되며 조각은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럼 인류는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고 문명은 어떻게 변하였으며, 조각의 변천은 어떠했나를 살펴보자.

⼦ 최초의 인류

종교적인 해석을 떠나 고고학자들과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인류는 두 발로 서서 활동하게 되며 자유로운 손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도구를 이용하면서부터 인간의 사고 능력은 점차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인류의 사고 능력이 발전되어 가는 것을 고인류의 화석 유골로 보아 현재로 올수록 뇌의 크기가 차츰 커져 가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인류의 화석 중에서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하였던 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약 200만 년 전 인류이다. 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들은 주로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는데, 동물의 뼈와 돌로 만든 간단한 무기가 함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도구를 사용해 짐승을 사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인류 중 현재의 인류와 가까운 것이 호모 사피엔스(크로마뇽인)이다. 약 20만 년 전에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의 뇌 용량은 현재 인류와 비슷한 수준(1500cc)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살던 시기는 기후의 변동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기후에 비해 전반적으로 추운 시대였다. 마지막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짐으로써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사이에 육지가 드러나 이 육지로 많은 동물과 호모 사피엔스가 이동하여 정착하였다.

구석기 시대 (기원전 3만-1만년 경)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인류는 사냥과 채집을 통해 생활하였다. 인류의 지적 능력이 향상되어 감에 따라 사냥 도구인 석기가 발전되어 간다. 이렇게 사냥과 채집으로 인류가 살아간 시대를 일반적으로 구석기시대라고 부른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기본적으로 사냥꾼이었는데, 이들이 맘모스, 들소 등 덩치가 큰 짐승을 집단적으로 사냥하는 모습이 알타미라 등의 동굴 벽화에 남아있다.

이 시대의 조각은 인간의 주술적인 바램을 표현하는 미술이 주된 흐름으로 동물 형태에 깃든 동물의 영혼을 제압하여 사냥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조각으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뿔잔을 든 여인'이 대표적인데 여체의 특징을 강조하여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인류가 언제부터 살았는지 아직 결론이 없다. 1966년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 우물동의 남쪽기슭 석회    암 동굴에서 발견된 일명 '검은 모루' 유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이다. 이곳에서는 29종 포유동물의 화석과 당시 인류가 운반해 온 강돌과 그들이 만들어 사용한 흔적이 있는 석기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석기의 제작수법은 석회암과 강돌을 이용하여 모루돌 위에 몸돌을 내리쳐 만든 이른바 '때려내기'수법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유적은 60-4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 신석기(기원전 1만-2000년경)

빙하기가 끝나 가던 약 1만 년 전에는 이전보다 인구가 훨씬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한층 개량된 무기와 조직을 갖춤으로써 인간의 사냥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때쯤, 짐승을 길들이고 야생 식물을 재배하여 정착 생활로 들어가는 신석기 시대가 온 것이다.

인류가 차츰 정착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문명의 첫 걸음이 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가축들이 고기와 젖, 그리고 의복을 위한 털을 줄 뿐 아니라 쟁기와 수레를 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특히 말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 인간의 이동 능력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산 경제 단계로 접어든 지역은 팔레스티나·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란고원 일부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아시아 지역이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기원전 8000년-기원전 7000년 전의 촌락 유적지들 중에서 유명한 것이 요르단 강 계곡의 유적이다. 이 유적들은 집단으로 건설된 주거의 흔적뿐만 아니라 신전 같은 공공 건물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방어를 위해 파 놓은 해자, 성벽, 관개 시설 등의 자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원전 5000년-기원전 4000년경에는 정착 생활을 하기 힘들었던 건조한 지역에도 관개 사업을 통해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촌락들은 교역뿐만 아니라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촌락들로부터 인류 최초의 도시들이 탄생하여 인류 문명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도시 국가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신석기 혁명으로부터 촌락이 등장하고, 촌락이 발전하여 도시와 문명이 생겨나는 과정이 여러 지역에서 나타났다.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나일 강 유역의 이집트, 인도 서북부의 인더스 강 유역, 그리고 중국의 황화 유역은 바로 대표적인 문명의 발상지이다.

우리 나라 신석기 문화는 대략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700년경으로 잡고 있다. 여러 유적이 발굴되며 조각품도 발굴이 되고 있다.

 



 

 








◆ 메소포타미아 조각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일찍이 세계 4대 문명의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곳이다. 수메르인들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고 우르, 우르크, 라가시, 키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지구라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다. 이후 북서쪽에 셈족 계통의 악카드인들이 들어와 통일국가를 건설했다가 수메르인들과 악카드인, 아모리인들의 왕국이 등장하며 패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크게 보면 유럽의 조각은 이집트인과 수메르인들로부터 시작된다. 누구를 앞세우는가는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있으며, 그리스 로마와의 연관성을 볼 때 메소포타미아로 시작하는 것이 쉬울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 지역에는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BC 5000- BC 4000년에는 농경생활을 영위한 정착주민도 나타나고, 이어 BC 3500-BC 3000년에는 이미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수메르인에 의해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고 설형문자도 만들어졌다.

조각은 신전의 예배상과 봉헌상, 기념비적인 부조, 장식조각 등이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텔 아스마르(고대 이름은 에슈누나)의 아부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神像)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눈동자를 끼워 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交信)을 말해주고 있다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신성한 빛을 응시하는 숭배자의 모습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편,

 

 

목재와 금박·라피스-라줄리[靑金石]·조가비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곧,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BC 2000년대 후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雄羊]》은 그 좋은 예이다.

바빌로니아 돌 조각의 정수는 저부조이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사자의 사냥 장면 등을 묘사한 것으로 부조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모습, 몸통은 앞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또한 기념비적인 조각은 라가시Lagash지방의 통치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수많은 초상 조각이 보이며, 그중 <뿔이 있는 관을 쓰고 있는 인물상>에서는 모델의 성격이 보일 정도로 사실적이다.


① 바빌로니아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의 왕국이 들어선 것은 기원전 1830년경에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들이 바빌론 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열면서부터였다. ‘고(古) 바빌로니아’로 불리는 이 왕국은 기원전 1600년경까지 남으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 전체와 북으로 아시리아를 포함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일대의 정치, 상업의 중심지가 된다.

고 바빌로니아는 제6대 함무라비 왕(B.C.1792∼B.C.1750) 때 전성기를 맞는다. 함무라비 왕은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지역을 평정하여 메소포타미아 세계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과학과 학문을 발전시켰으며 악카드어를 국어로 삼았고, 역법(曆法)을 통일시키는 한편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불리는 282조로 구성된 법전을 정비하여 바빌론을 명실상부한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 발전시켰다.

함무라비 왕이 죽은 후 고 바빌로니아는 쇠퇴하여 기원전 1531년경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이후 바빌로니아의 지배권은 카사이트족에게 넘어간다. 400여 년간의 카사이트 지배 후 도시국가 가운데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을 얻는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 바빌론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강성하고도 잔학하기로 유명했던 아시리아는 군사력을 길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가 자립하여 제국으로 발전했다. 강대한 아시리아는 니네베(Nineveh)를 수도로 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장악하고 한때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까지 함락시켰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에서 임명한 부왕(副王)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신바빌로니아는 주신(主神) 마르두크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신전과 제단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설형문자로 기록된 당시 문서와 바빌론 성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바빌론 안에는 주신 마르두크 신전 55개를 포함하여 일천 개가 넘는 신전이 있었고,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제단만도 180개가 있었다. 마르두크 신전을 지을 때 그에 딸린 거대한 지구라트도 함께 만들어졌다. 바빌론 시의 중심부에 있는 마르두크 신의 성역 안에 화려한 청색 벽돌을 구워 탑을 쌓아올렸는데, 고대 전설 속의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이 ‘바벨탑’은 수세기 전 아시리아인들이 파손한 것을 신 바빌로니아 왕조를 개창한 나보폴라사르 왕이 기초를 쌓고, 그 아들인 네부카드네자르가 완성하여 재건한 것이다. 탑은 약 90미터의 높이로 건립되었지만 현재 지상에 그 토대의 윤곽만 남아 있다.

역사학자들은 성서 속의 바벨탑을 지구라트의 하나로 보고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일대와 현재 이란 땅에 속하는 엘람 지역에는 ‘지구라트’(ziggurat)라는 거대한 탑이 도시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부터 기원전 500년경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지구라트가 세워졌다. 지구라트는 이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각 도시는 자체의 수호신들을 위해 지구라트를 최소 하나씩은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이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② 아시리아Assyria(기원전 1,000년경 ∼ 612)

아시리아는 기원전 1220년경에 바빌론을 함락시키고 점점 판도를 확장해갔다. 아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수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정벌, 향연, 사자사냥 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아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조각은 같은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조각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대한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집트 조각은 보다 체계적으로 법식에 의해 발전해 나갔다. 아마르나 시대의 조각가인 투스모시스의 작업장에서는 석고로 데스마스크를 떴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 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 덕택에 이집트의 미술은 초시간적, 영속적 기능을 하게된다. 또한 죽은자를 위한 미술이므로 아름다움보다는 미술작품에 영원성을 담으려했다. 예로 파라오 왕이 죽은 후에도 생전과 같은 절대권력의 소유와 승천을 돕기 위한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하고 완전한 묘사를 위해 특징적인 각도와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했는데, 주인은 종보다 큰 점, 좌상의 경우 두손은 무릎 위에 놓는 점, 남성의 피부색이 여성보다 검은 점, 모든 인물이 어떤 기저선상에 놓이는 점 등이 예라 할 수 있다. 부조에서 표현 방식은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한인간의 전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루었다. 즉 얼굴과 다리는 측면으로, 엉덩이는 3/4각도로, 상체는 전방으로, 그리고 눈도 전방으로 표현하였다.

3000년간 지속된 이집트 미술은 비교적 정확한 부분묘사와 균형 있는 신체비례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질서감각과 기하학적 규칙성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들의 조각기법과 표현의 특징은 초기 그리이스 시대로 이어진다.

⼗ 파라오 이전의 상,하 이집트

 

세계에서 제일 긴 강 나일(The Nile)은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지금부터 6,000년 전 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적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되었으니 나일강 삼각주의 하(下) 이집트와 상류의 상(上) 이집트가 그것이다. 상 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 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 파라오들의 시대

1)초기왕조시대 (기원전 3000-2780년경)

 

1,0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상 이집트의 르메르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상,하 이집트의 중간 지점인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출토된 '나르메르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호루스 밑에 꿇어앉아 있는 하 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왕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2)고왕국시대 (기원전 2780-2040년)

고왕국시대는 마네토의 제3 - 6왕조에 해당된다.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조세르 치하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조세르의 무덤으로 고안해 사카라에 건설한 '계단식 피라미드' 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서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조직화된 국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 (기원전 2723-2563년) 에서 나타난다.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 피라미드를 기자 지방에 세운 것이다. 평균 2,300kg 짜리 돌 2백 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건축 기술, 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라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神)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3)중왕국 시대 (기원전 2133-1575년)

이 시기에는 암굴분묘가 등장하며,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 라고 부른다. 아시아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가 제2중간기 (기원전 1785-1575년) 이다.

4)신왕국시대 (기원전 1575-664년)

 

석재건축의 전성기로, 제18왕조 (기원전 1575-1308년) 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텝 1세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3폭포까지 확대했다. 제18왕조의 4대 군주 투트모세 2세의 정처 핫쳅수트는 그녀의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투트모세 3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신 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 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탄카멘 왕의 황금 가면' 등으로 잘 확인된다.

9살에 왕위를 계승한 소년왕 투탄카멘은 즉위 3년째 되는 해에 도읍을 옮기고, 아텐 숭배를 버렸으며, 이름도 투탄카멘으로 바꾸었다. 그 뒤 왕권은 아이, 호렘헵을 거쳐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람세스의 가문으로 넘어간다. 19왕조 (기원전 1308-1186년)는 람세스 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였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는 66년간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 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압제자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이다.

뒤를 이은 그의13째 아들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 (출애굽) 할 당시의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 기념비에 있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다. 제20왕조 (기원전 1186-1085년)의 오랜 평화 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 (기원전 1009∼664년) 가 이어진다.


에게Aege미술





 

 

 


그리스문명  이전에 이 지역에 존재한 문명으로, 에게해 주변의 '키클라데스' 문명, H. 슐리만 이 발견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문명 과 A. 에번스가 발견한 크레타의 전설적인 왕의 이름을 딴 '미노스'문명의 총칭이다. BC 16세기가 전성기였던 크레타문명은 크노소스  유적이 대표적이다. 해안 경사면에 있는 크고 복잡한 석조궁전과 개방적인 벽화를 특색으로 하며, 무기와 전투시설은 적다. 지금도 미해독인 선문자(線文字) A를 사용하였다. BC 15세기에 미케네인들에게 정복당한 후 선문자 B가 도입되었고, 미술양식도 변하였다. BC 12세기에 제2차 그리스인의 침입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제1차 미케네문명은 본토에서 남하 정주한 그리스인이 크레타문명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하였다. 성채 유적과 무기가 훌륭하다. 선문자 B만을 가졌는데 이 문자는 1953년 M. G. F. 벤트리스 가 해독하여, 사용자가 그리스인이었음을 확증하였다. BC 12세기에 제2차로 남하한 그리스인(도리아인)에게 파괴되었다.

사자문은 기원전1250년경으로 미케네문명에 속한다. 거대한 사자조각은 최초의 기념비적인조가이며, 마스크는 기원전16세기조각으로 그리스 고전기를 예시하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영웅이며 미케네 왕 '아가멤논 마스크'라 불린다.

그리스 미술 (B.C 7 - 4)

그리스 미술은 균형, 조화, 비례를 생명으로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미를 추구하여 고전미의 전통을 창조했다. 사물을 보는 시점이 이전의 왜곡된 방식이 아닌 올바른 방식으로 발전하여 이집트 미술에서 보이는 평면성에서 벗어나 공간감을 얻게 되었다. 공간감의 획득은 형상이나 인물 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설득력 있게 전달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을 그리스 미술의 서술적기능(Narrative function)이라 한다.

그리스 미술을 크게 전기, 후기 헬레니즘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 그리스미술 (B.C7 - 5)

고전기 혹은 아르카익기라고하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미술이 극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술의 서술적 기능이 태동한 시기이다. 또한 원시적인 신들에 관한 전설이나 신화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함으로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시기이다. 따라서 기하학, 자연과학, 철학 등의 학문이 아울러 발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미술로 도리아식 신전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을 들 수 있다.



⼗후기 그리스미술 (B.C5-4)

전통의 고전기로 숭고한 미가 완성되어 '원반 던지는 사람'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페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여 정치적 번영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다양성을 후기 그리스 미술의 특징으로 들 수 있으며 대표작품으로 가냘픈 기둥에, 곡선이 가미된 기둥머리를 지닌 이오니아 양식으로 건축된 [에렉테움 신전]을 들 수 있다.

 

⼗헬레니즘 미술 (B.C4-A.D.1)

알렉산더 제국하의 미술양식을 말한다. 소아시아와, 인도국경, 이집트까지 영토확장을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서방의 문화가 혼합되었고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기둥양식 보다 훨씬 강하고 화려한 인상의 코린트식 건축 양식을 들수 있다.

또한 조화와 균형보다는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강렬한 극적효과, 거칠고 인상적인 효과에 주력하였다.

격렬함과 긴장감으로 충만되어진 리시포스의 [라오콘]상은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낸다. 대표작품으로 사모트라케섬의 [니케상], 밀로의 [비너스]를 들수 있다.

 

◆ 로마 미술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그리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 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 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 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실용적인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 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인들이 신전의 프리즈(박공)에 새겨 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 초기기독교와 비잔틴 미술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를 새로운 미술의 시작으로 본다. 로마 공무원에서 성직자로 표현 대상이 바뀌며, 육체적인 형태에서 기독교 이상에 부응하는 양식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성 사비나성당의 문,c.430.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기독교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세미술 MIDDLE (A.D. 5c - A.D. 15c)

4세기 경부터 1천년간은 기독교 중심 사회였다. 중세의 초기 500년 동안은 전쟁과 약탈, 혼란한 정치가 계속되는 일종의 암흑시기(Dark age)였다. 그리고 예술은 기독교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라는 신(神) 중심의 인간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였으므로 예술에 있어서도 암흑시기였다.

중세는 초기미술과 로마네스크, 유비법(유비추론) 붕괴 이후의 고딕양식으로 분류된다.

1)중세초기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은 신(神)적이고, 영원하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미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술가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이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뚜렷이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나타나지 않은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로마네스크 미술

로마풍이란 의미로서 문화의 서유럽 중심화의 시초였다. 오랫동안 교회 건물에 조각을 금지했다. 이교적인 우상숭배로 오해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대문이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번성을 상징한다. 유럽 전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 경제, 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양식과 흡사한 교회가 많이 건축되었으며, 단단하고 육중한 모습의 석조건물로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전투적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이나 회화는 중세초기에 비하여 비교적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우나 여전히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므로 교회의 내부장식에 이용되었다.

3)고딕양식 (A.D.13c-14c)

'야만인 고드Goth인의 건축'이라는 북방 양식의 경시에서 시작되었다. 신의 재발견으로 인체의 형태를 찾았으며, 조각이 수도원에서 성당의 공개된 장소로 옮겨졌다. 12C 말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미술양식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의 세계를 가시화 시킬 수 없으므로 인간능력을 충실히 나타내려는 시도(유비법의 붕괴)가 생기면서 원근법, 인체묘사, 형태 등에 관심을 쏟았고 이후 르네상스 발생의 초석이 된다.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와는 달리 뾰족한 첨형아치가 특징이다. 또한 로마네스크 교회건축물과는 대비적으로 가느다란 석재 기둥 및 유리(스테인드글래스)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내부가 밝고 넓어지게 된다.

◆ 르네상스 RENAISSANCE (A.D.1400 - A.D.1600)

르네상스는 부활/재생을 뜻하며 14세기 말부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번영을 꿈꾸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은 첫째, 귀족계급과 부자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둘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였으며, 셋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이 많았다는 것 등이다. 중세 봉건영주, 귀족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권리와 능력을 자각한 시민계급의 등장은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낳았고, 이는 중세를 지배하던 신중심의 시선을 인간중심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피렌체의 메디치가 처럼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여 미술의 새로운 후견인이 되었다.

미술은 교리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전달수단으로 주목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미술처럼 서술적 기능이 부각되었고, 서술적 기능을 충실히 하기 위해 정확한 사실적 묘사가 중요시되었다. 또한 그들은 미의 구현이란 어떤 이성적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과학적 예술이 발달하였다. 동시에 기하학, 해부학, 원근법 등도 발전하였다. 게다가 미술교육기관인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화론이 등장하였다.

초기 르네상스(Quatrocento, 1400년대)에는 현실적, 객관적 정확성에 치중하였다. .

대표적인 작품으로 도나텔로(1386-?)<성지오르지오상>은 헬레니즘에서 영향을 받았고 이상적인 15세기 군인유형이다. 다비드상은 메디치가를 위해 제작된 것이다.

1500년대는 이성적 규칙을 통한 객관적인 정확성과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의 이념이 잘 구현된 전성기 르네상스(Cirquecento)로 황금기다. 후기 르네상스는 매너리즘으로 불리며 예술적 기교에 치우친 타성적 예술이다. 다른 어떤 세기보다 많은 천재들이 나타났으며 가장 두각을 나타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들 수 있다.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화가인 동시에 시인, 건축가이며, 그 당시 세도가였던 메디치가의 소장품들, 즉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했다. 그는 이로부터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는 고대의 스승의 비법을 알았으며 인체의 디테일 한 부분까지 연구하였다. 그의 가장 뛰어난 역량은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와 그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그가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의 일부분이었던 군상 중 하나인 빈사의 노예와 다윗상, 모세상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평소에 회화에서 보다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다. 격렬하고 뒤틀린 듯한 포즈,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듯한 자세 등은 아무리 자세가 복잡하더라도 하나의 통일감, 즉 전체적인 윤곽의 뚜렷함이나 단순하고 안정된 듯한 느낌이 있다.

◆    바로크 BAROQUE(A.D. 17C)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르네상스의 이성적 규칙에 의한 지나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바로크는 포르투칼어의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가 지닌 단정하고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해 장식이 지나치고 과장된 미술양식에 대한 경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혹은 르네상스가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균형, 조화의 세계에 비하여 유동적이고 강렬한 남성적인 감각이 강조되어 붙어진 이름이라 한다. 피렌체 조각가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아들인 잔로렌초 베르니니는 신학적인 주제에 영감을 받았다. 대각선으로 돌린하는 운동감은 르네상스에서 해방되었다.

 

⼦ 로코코 ROCOCO(A.D. 18C)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해서,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 19세기 조각

⼧ 신고전주의 NEO CLASSIC(A.D. 18C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 등이 우선 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실제 사건을 주제로 삼는 것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사실주의 (A.D. 19C 중엽)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였다. 19C에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으로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이상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 역할을 했다.



⼧ 인상주의 IMPRESSIONISM (A.D. 19C 말)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 색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의 발명은 그들의 야외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순색을 이용한 색체분할법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점묘법의 사용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나고, 조각에서는 '흙 붙임'의 결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터치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가로 회화의 마네, 모네, 르느와르, 드가와 조각의 로댕 등을 들 수 있다.






⼦ 20세기 조각

회화의    추상미술 사조와 동행하는 미술이 조각에서도 브랑쿠시와 모딜리아니 등의 작품에 나타난다.

브랑쿠시의 작품은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았고, <연속기등>은 전쟁 희생자 기념비이다.



 

 






 

⼦ 입체파 (CUBISM A.D. 1900 - 1914)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에스타프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회화에서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느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 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피카소, 브라크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 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미래파 (FUTURISM) 와 구성주의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효시인데, 마리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옴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쟈코모 발라의 5인의 작가가 연명으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 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였다는 것과 스피드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시간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한 데 있다.

이 유파가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의의는 크다.

 

키네틱아트

미래파의 움직임을 물리적 운동으로 구체화한 것이 키네틱 아트로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처럼 자연적인 움직임과 기계 장치를 이용한 움직이는 작품이 등장한다.

 

⼦ 다다이즘 (DADAISM)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은  1915-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 문명, 반 합리성 예술운동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12년경부터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만 레이와 함께 뉴욕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으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아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특색이다. 이들 수법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예술 등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라울 하우스만의 작품은 현대 지식인을 비꼬는 주제를 담고 있다.


 ⼦ 전후 미술

전후의 미술은 다양한 형태와 소재적 특성을 지닌 미술 양식과 더불어 전통적인 개념을 바탕에 두고 형태적인 변모를 하고 있다.


 

⼦ 미니멀 아트 (MINIMAL ART)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킨다. 여기서 최소한이란 일루전의 극소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회화의 감동, 마티에르의 풍부함 내지 자기 표현은 곧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프랭크 스텔라, 리차드 세라 등을 들 수 있다.

 

 

⼦ 팝 아트 (POP ART) 누보레알리즘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플러(popular)'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팝 아트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적인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

팝 아트의 작가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앤디 와홀, 로히 리히텐스타인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 예를 들면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초 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 개념미술 (CONCEPTUAL ART)

결과물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중요시하며 '미술의 빗물질화'를 지향한 개념 미술은1960년대 말 '회화는 죽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각 부분이 하나의 사조가 될 수 있지만 큰 테두리에서 나눠보면 아래와 같다.

 

⼗대지미술

'대지미술가'처럼 지구환경을 작품의 발표 무대로 활용하는 순수환경 작품으로 나뉜다.

크리스토의 <우산 일본-미국>1984-91은 높이6미터 펼친 크기 9미터의 우산을 알본의 이바라키현에는 청색, 미국 로스엔젤레스에는 황색으로 동시에 설치했다.

 







⼗행위미술

약간의 개념 상 차이가 있지만, '프로세스 아트', '해프닝', '퍼포먼스' 같이 작품의 결과물보다는 작품 제작 과정에 의미를 두는 미술로, 제작 과정의 행동을 강조하거나 연극적 공연성을 지닌다. 우리 나라에서는 큰 행사의 오프닝 공연으로 인식되어 행위의 결과에 '출품비'가 아닌 '공연비' 혹은 '출연료'를 주기도 한다.

⼗설치미술

다양한 재료로 주로 일회성 전시를 위하여 발표하는 작품으로 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디어미술

컴퓨터와 새로운 대중 매체의 발달로 작품의 영구성보다는 대중의 생활과 어우러지며, 미술가 이외에 다양한 기술을 지닌 전문가가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 극사실주의 (HYPER REALISM)

포토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리는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주관을 적극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 없는 장소, 친구, 가족 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듀안 핸슨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현실을 거부했던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현실을 재창조하는 의미를 포함하며, 양식적 특징을 짓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이라기보다는, 그 중심적 동기가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재생된 이미지로서 과거나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어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정된 일관성 있는 체계는 아니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조각에서 작품의 좌대가 사라지고, 낙서나 장난, 설치나 산업폐기물, 인체의 학대와 충격적인 것을 써가며,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그 정체성의 모호성에 당혹하게 한다. 정체성 자체까지 부정하려드니까...

⼦ 공공미술

우리나라에서는 1%법이라는 이름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경우 건축비의 1%를 예술품을 구입에 사용해야 한다. 미국의 일부 주는 3%로 올라가는데 반하여, 오히려 지금은 그 비율이 낮아지고 있다. 공공미술은 무미건조하고 산업화된 환경을 인간 친화적으로 바꾸고자하는 정서적 목적으로 설치한다.

The end.